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의 이해
 이 세상에는 수그러들지 않는 여러 논쟁 거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부의 불평등과, 부의 재분배 '만큼 영원히 지속되는 사회적 담론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우연(예를 들어 부잣집에서 태어남)이나 타고난 우연(타고난 능력과 재능)이 분배 몫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부자집에서 태어나거나 남들보다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은 남들보다 훨씬 더 유리한 '출발선상'에 있게 된다. 이러한 도덕적 임의성에 의해서 생기는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 존 롤스는 강제 평등을 해결책으로 보지 않는 대신에 '차등의 원칙'을 대안으로 제시하게 된다. 차등의 원칙은 이러한 불평등이 어느 수준까지 정당화 될 수 있는지를 제시한 철학적 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 차등의 원칙에 따르면 이러한 불평등이 정당화될 경우는 오직 그 차등이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할 경우이다. 이런 설명만 가지고는 막연하다. 어느 수준의 불평등까지가 허용되는 것일까?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에 의해 허용가능한 '불평등'의 수준은 어떻게 결정되나?

 우선 차등의 원칙은 사회적 불평등을 허용하면 사회적 약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럼 얼마만큼 불평등을 허용해줄 것인가? 허용된 불평등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여기에 비례하여 사회적 약자가 받는 혜택이 커질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 철학적인 원칙을 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차등의 원칙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는 불평등은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황이 최대로 개선되는 상황까지만 허용된다. 즉 차등의 원칙에 의하면 허용된 불평등이 증가하게되면, 처음에는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점점 증가하지만, 일정 수준의 이상의 불평등을 허용하게 되면,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되려 줄어들기 시작한다고 본다. 즉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허용 가능한 최대 불평등 수준 이하
사회적 불평등이 증가하면 여기에 비례하여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증가.
(2) 허용 가능한 최대 불평등 수준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최대치에 다다름
(3) 허용 가능한 최대 불평등 수준을 넘어선 불평등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더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효율성이 감소하기 시작함.


<참고>

존 롤스의 정의의 두 원칙

제 1원칙 : The Liberty Principle(자유의 원칙)
각자는 모든 사람의 유사한 자유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전체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제 2원칙 : The Equality Principle(평등의 원칙)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가지, 즉
(a) 그것이 정의로운 저축 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되고,
: 차등의 원칙(The difference principle)

(b) 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가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
- 존 롤스의 '정의론'에서 발췌

 

 

 

어렵다. 매우 어렵다. 존롤스의 정의론을 읽다가 포기한 이유이다. 언젠가 시간이 날 때 다시 책을 들어 펼쳐봐야겠다. 책은 늘 내 책꽃이에 가깝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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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리적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던 나에게 던져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우리는 어릴 적부터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아온 세대로 개인 간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똘레랑스에 익숙해져 있다. 어떠한 특정한 종교, 특정한 가치를 국가가 개인에게 강요해서는 당연히 안 되는 것이며 공적인 삶에서 이를 드러내는 것조차 매우 위험한 일이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나는 당신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겠다라고 한 볼테르의 말에 감동을 받는 소시민 중의 하나이었다. 이러한 내가 서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처음 보았을 때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적인 영역에서 개인의 도덕적 가치를 좀처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가치중립적인 사회에 익숙해있던 터라 과연 누가 정의라고 하는 가치 충만한 주제를 그것도 감히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말하고자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원제는 Justice로 덜 도발적이다). 이 책은 다원주의와 똘레랑스라고 하는 다소 메마른(?)’ 시대정신에 익숙해져있는 나를 매혹시키기에는 충분하였다. 무미건조한 가치중립적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책 속에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에 충동구매를 하게 되었다(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안 것은 책을 산 뒤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이 책을 사면서 몇 년 전에 있었던 유사한 충동구매사건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어느 날에도 서점을 지나가다가 비슷한 류의 책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존 롤스의 정의론이라는 책이었다(나중에 존 롤스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자주 등장하는 철학자임을 알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러나 정의론은 방대한 양도 양이지만 전문서적이라 너무 어려워서 중도에 읽다가 포기한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는 전공자를 위한 도서가 아님이 분명해보였고 읽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아보였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정의의 논의는 반드시 가치중립적이어야 하나?

  역사적으로 보면 왜 현대의 사회에서 국가가 왜 가치중립을 지향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게 되는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중세를 벗어나면서 기독교 교리가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유일한 가치였던 중세시대의 시대풍조에 반발하기 시작하였고, 중세의 절대권력에 대한 투쟁의 산물로서 전근대에 자유주의가 철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깊게 뿌리내렸다. 이 책에 의하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고 개인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시대정신은 철학적으로는 칸트의 도덕철학과 존 롤스의 정치철학을 거치면서 그 철학적 토대를 공고히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정치 철학자로서 이러한 거대한 시대 흐름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공적인 영역에서의 정의의 논의는 반드시 가치중립적이어야 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면 도덕가치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회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체적인 책의 흐름은 마치 정--합의 과정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절대적인 지침이었던 중세의 시대사상이 이라면 이에 반발하여 나타났고 현대 시대의 근간이 된 자유주의와 합리적 다원주의를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로는 사회정의를 논의하기에는 불충분하다라는 마이클 샌델의 주장이 바로 에 해당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철학부터 현대의 존 롤스까지의 정치철학에 대해

  이 책의 처음 부분에서는 시선을 끄는 여러 가지 난해한 도덕적 딜레마 상황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구체적인 상황별로 판단을 내리게끔 한다. 다양한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이 전개되고 여기에 대한 여러 가지 첨예하게 대립되는 의견들을 제시하며 결국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은 존재하는지 묻도록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그러고 나서 정의의 원칙을 제시했던 여러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에 대해 소개한다. 여기에는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 벤담의 공리주의, 칸트의 도덕철학 그리고 현대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철학 등이 일반 독자들에게도 잘 이해될 수 있게끔 쉽게 소개되었다. 시대적인 흐름을 보면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정의는 영광, 미덕, 그리고 좋은 삶에 관한 논쟁이었지만 근대의 칸트와 현대의 존 롤스로 넘어오면서 영광, 미덕, 도덕적 가치 문제에서 공정성과 권리를 분리하고자 한다. 이를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부르는데 어떤 도덕적 판단이 옳은가는 더 이상 정치적 자유주의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민들에게 특정한 도덕적/종교적 교리에 기초한 법을 강요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가치중립적 다원주의와 자유주의에 맞서는 이 책의 결론

  장막의 뒷편에 서서 주관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의 판단을 '유도'하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책의 말미에서 결국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의를 좋은 삶에 대한 논의에서 분리하고자 하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현 시대의 주류정신인 가치중립적 다원주의를 반박하는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완곡하게 드러내게 된다. 즉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궁극적으로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문제를 정의의 본질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예를 제시한다. 여기에는 낙태 논쟁, 그리고 배아줄기세포 연구 허용 문제 등이 예로 제시되었다. 낙태 논쟁을 들여다보면 찬성론의 경우 피상적으로는 중립성과 선택의 자유를 낙태 권리를 인정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잉태된 순간부터 인간이라는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암묵적으로 단정하는 셈이 된다. 즉 낙태 허용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도덕적, 종교적 입장을 정리하지 않으면 해결 할 수 없다. 이렇듯 정의는 가치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의는 결국 시민의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의 추구는 시민의 자유라고 하는 기본권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이유로 도덕을 회피하는 정치보다는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에 우리의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정의에 대한 논의는 좋은 삶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고 이는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비록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또는 단체의 서로 다른 가치관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이 다소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이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는 필수적이고, 궁극적으로 인간은 언제까지 가치중립다원주의에 만족하고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험난하고 많은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방향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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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 ; 하이젠베르크와 플라톤

아인슈타인(Einstein)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20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 상이지만, 20세기 이론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에 못지않은 임팩트를 미치는 인물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이다. 사실 물리학을 배우다 보면 대중적인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전공책 속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나기 힘들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을 접하면서 학부에서도 쉽게 만나게 된다.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상대성이론으로 대표되는 아인슈타인은 결정론적 사고관을 끝까지 버리지 않음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인 '확률론적 세계관'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구시대적인 인물의 이미지가 있기까지 하다. 게다가 20세기에 꽃을 피운 전자공학과 최첨단 기술들이 새로운 양자역학적 원자론에 기반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사실 하이젠베르크의 존재감은 더 부각되는 것 같아 보인다.

"부분과 전체"는 하이젠베르크가 쓴 책으로 자신의 청년시절부터 말년까지의 물리학자로서의 삶과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 그리고 다양한 인접 학문들(철학, 종교, 언어, 생물학, 화학 등)에 대한 그의 관점과 생각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세계관 또는 우주관은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인 양자역학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기반을 둔 다른 학문들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개별과학적 관점(나무, 부분)에 그치지 않고 통합적인 관조(, 전체)를 보고자 하는 그의 철학자적 열망을 느낄 수가 있었다.

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그의 청년시절에 나눈 친구들과의 대화 내용을 보면 소년시절부터 그는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의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있다. 어린 청년시절인 1910년대 당시의 원자 및 분자론은 입자의 위치와 모든 상태들이 확정되어 있으며 보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라는 개념에 기반한 원시적인 것이었다. 그 시절부터 이미 하이젠베르크는 '물질의 최소부분'에서는 이러한 기존의 통념으로는 원자의 미시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궁극적으로 수학적 형식에 부닥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추종하였다고 하는 플라톤의 세계관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이러한 출발선상에서 그는 평생의 업이자 세계관인 양자물리와 일생을 함께하게 된다. 여러개의 소주제의 챕터로 나뉘어 있는 이 책은 마지막 챕터도 결국 '소립자와 플라톤 철학'으로 종결짓는 것으로 보아 그의 사상에 플라톤이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현상의 세계'의 언어로는 원자보다 작은 미소 세계의 실체적 진실을 기술할 수도 없고, 이러한 실체적 진실은 우리가 지각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이런 '지각의 세계'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양자역학의 결론은 , '현상의 세계'는 사실 '동굴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고 이데야(idea)는 저 넘어에 있다고 하는 플라톤의 철학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하이젠베르크는 플라톤의 이러한 '가설(?)'을 완성한 플라톤의 후계자로 불리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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