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던 나에게 던져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우리는 어릴 적부터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아온 세대로 개인 간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똘레랑스에 익숙해져 있다. 어떠한 특정한 종교, 특정한 가치를 국가가 개인에게 강요해서는 당연히 안 되는 것이며 공적인 삶에서 이를 드러내는 것조차 매우 위험한 일이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나는 당신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겠다라고 한 볼테르의 말에 감동을 받는 소시민 중의 하나이었다. 이러한 내가 서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처음 보았을 때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적인 영역에서 개인의 도덕적 가치를 좀처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가치중립적인 사회에 익숙해있던 터라 과연 누가 정의라고 하는 가치 충만한 주제를 그것도 감히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말하고자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원제는 Justice로 덜 도발적이다). 이 책은 다원주의와 똘레랑스라고 하는 다소 메마른(?)’ 시대정신에 익숙해져있는 나를 매혹시키기에는 충분하였다. 무미건조한 가치중립적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책 속에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에 충동구매를 하게 되었다(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안 것은 책을 산 뒤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이 책을 사면서 몇 년 전에 있었던 유사한 충동구매사건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어느 날에도 서점을 지나가다가 비슷한 류의 책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존 롤스의 정의론이라는 책이었다(나중에 존 롤스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자주 등장하는 철학자임을 알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러나 정의론은 방대한 양도 양이지만 전문서적이라 너무 어려워서 중도에 읽다가 포기한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는 전공자를 위한 도서가 아님이 분명해보였고 읽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아보였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정의의 논의는 반드시 가치중립적이어야 하나?

  역사적으로 보면 왜 현대의 사회에서 국가가 왜 가치중립을 지향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게 되는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중세를 벗어나면서 기독교 교리가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유일한 가치였던 중세시대의 시대풍조에 반발하기 시작하였고, 중세의 절대권력에 대한 투쟁의 산물로서 전근대에 자유주의가 철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깊게 뿌리내렸다. 이 책에 의하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고 개인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시대정신은 철학적으로는 칸트의 도덕철학과 존 롤스의 정치철학을 거치면서 그 철학적 토대를 공고히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정치 철학자로서 이러한 거대한 시대 흐름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공적인 영역에서의 정의의 논의는 반드시 가치중립적이어야 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면 도덕가치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회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체적인 책의 흐름은 마치 정--합의 과정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절대적인 지침이었던 중세의 시대사상이 이라면 이에 반발하여 나타났고 현대 시대의 근간이 된 자유주의와 합리적 다원주의를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로는 사회정의를 논의하기에는 불충분하다라는 마이클 샌델의 주장이 바로 에 해당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철학부터 현대의 존 롤스까지의 정치철학에 대해

  이 책의 처음 부분에서는 시선을 끄는 여러 가지 난해한 도덕적 딜레마 상황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구체적인 상황별로 판단을 내리게끔 한다. 다양한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이 전개되고 여기에 대한 여러 가지 첨예하게 대립되는 의견들을 제시하며 결국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은 존재하는지 묻도록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그러고 나서 정의의 원칙을 제시했던 여러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에 대해 소개한다. 여기에는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 벤담의 공리주의, 칸트의 도덕철학 그리고 현대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철학 등이 일반 독자들에게도 잘 이해될 수 있게끔 쉽게 소개되었다. 시대적인 흐름을 보면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정의는 영광, 미덕, 그리고 좋은 삶에 관한 논쟁이었지만 근대의 칸트와 현대의 존 롤스로 넘어오면서 영광, 미덕, 도덕적 가치 문제에서 공정성과 권리를 분리하고자 한다. 이를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부르는데 어떤 도덕적 판단이 옳은가는 더 이상 정치적 자유주의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민들에게 특정한 도덕적/종교적 교리에 기초한 법을 강요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가치중립적 다원주의와 자유주의에 맞서는 이 책의 결론

  장막의 뒷편에 서서 주관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의 판단을 '유도'하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책의 말미에서 결국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의를 좋은 삶에 대한 논의에서 분리하고자 하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현 시대의 주류정신인 가치중립적 다원주의를 반박하는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완곡하게 드러내게 된다. 즉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궁극적으로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문제를 정의의 본질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예를 제시한다. 여기에는 낙태 논쟁, 그리고 배아줄기세포 연구 허용 문제 등이 예로 제시되었다. 낙태 논쟁을 들여다보면 찬성론의 경우 피상적으로는 중립성과 선택의 자유를 낙태 권리를 인정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잉태된 순간부터 인간이라는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암묵적으로 단정하는 셈이 된다. 즉 낙태 허용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도덕적, 종교적 입장을 정리하지 않으면 해결 할 수 없다. 이렇듯 정의는 가치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의는 결국 시민의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의 추구는 시민의 자유라고 하는 기본권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이유로 도덕을 회피하는 정치보다는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에 우리의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정의에 대한 논의는 좋은 삶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고 이는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비록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또는 단체의 서로 다른 가치관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이 다소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이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는 필수적이고, 궁극적으로 인간은 언제까지 가치중립다원주의에 만족하고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험난하고 많은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방향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본다.

Posted by Platon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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