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새롭게 발견한 사회과학 지식이 있을 때, 보통은 이 사회과학 원리를 적용하여 앞으로의 근미래를 예측하는 데 사용하게 된다. 지금의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라면 이 원리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사회과학도 다른 과학의 분야들처럼 대상을 탐구하고 그 대상의 구조와 시간에 따른 변화의 과학적인 원리를 탐색하므로 매우 자연스러운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정말 미래를 예측하는데 도움이 될까?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호모데우스'에서 사회과학적 지식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 빗나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매우 명확하다. 현재의 사회 상태를 기반으로 연구한 사회과학 연구결과는 그 구성원들이 현재의 이론을 모르는 상태에 있을 때 나온 것이다. 하지만 사회과학 연구 결과가 나오게 되어 사람들이 이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사회는 우리가 알던 이전의 사회가 더 이상 아니다. 이 연구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고, 새 연구결과는 더 이상 쓸모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로 그는 그의 책 '호모데우스'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붕괴 이론을 들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폭력적 갈등이 점차 심화되어 결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이러한 카를 마르크스의 통찰은 매우 예리한 것이었지만 그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그 이유는 책의 원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마르스크스는 자본주의자들이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수의 추종자들만 그의 예측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의 글을 읽었다. 하지만 그 사회주의 선동가들이 지지세력을 갖게 되고 힘을 얻자 자본주의자들은 초긴장했다. 그래서 그들도 자본론을 정독했고,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도구와 통찰을 여럿 차용했다......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진단을 받아들이면서 이에 따라 행동도 바꾸었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의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국민을 정치체제 안으로 통합하려고 시도했다...결과적으로 마르크스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공산주의 혁명은 영국, 프랑스, 미국 같은 산업강국을 집어삼키지 못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문제는 수 많은 사회적 이론들이 빠르게 등장하고 소멸하는 현대 시대이다. 중세나 근대사회에 견주어 봤을 때 현대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회과학 이론들이 등장한다. 이런 이론들을 습득한 사회는 곧바로 그 이론으로 설명 및 예측 가능했던 사회를, 예측 불가능한 사회로 바꾸어버린다. 저자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데이터를 더 많이 보유할수록, 역사를 더 잘 이해할수록 역사는 그 경로를 빠르게 변경하고, 우리의 지식은 더 빨리 낡은 것이 된다.....오늘날 우리 지식의 양은 맹렬한 속도로 증가하고 있고, 따라서 이론상 우리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새로 발견한 지식은 더 빠른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쌓는 속도를 높이고, 그것은 더더욱 빠른 격변을 초래한다. 그 결과 현재를 이해하거나 미래를 예측하는데 점점 더 무능력해진다."

 

앞으로의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직감할 수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 끊임없이 생산되어 나오는 무한한 지식들이 사회 구성원들을 바꾸고, 그들은 곧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여 예측들을 쓰레기통으로 보내버린다. 정보의 습득은 점점 더 빨라지고,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패턴을 바꾸어버리며 습득된 정보는 빠르게 쓸모없어진다.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특이점'에 왔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특이점이라는 개념은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쓰이던 용어지만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가 나온 이후부터 일반인들이 '무엇인가 기존의 예측 가능한 룰에서 벗어나는 상태에 도달함'를 말할 때 즐겨 쓰는 인터넷 용어가 되었다. 

 

레이 커즈와일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

쉽게 말해서 어느 시점에는 예측불가능한 변화가 상상할 수 없는 매우 빠른 속도로 펼쳐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성질로 말이다. 그리고 이를 예측하려고 하는 시도는 점점 더 쓸모가 없어지게 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눈뜨고 코베이다"라는 속담과 같이, IT 및 과학기술의 발달과 새롭게 등장한 사회지식의 콤비가 급격한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고,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더 빠른 속도로 더 많은 지식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이것 자체가 더 빠른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탈출할 수 없는 순환고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엔 우리가 무엇인가를 예측하는 게 무의미한 수준에 다다를 것이다. 장기적인 예측은 물론, 1달 단위의 초단기적인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올 수 있을 것이다.

 

단기간의 예측조차 힘들어지는 시대가 오겠지만, 어쨌든 시간이 흐른다는 물리법칙은 불변할 것이고, 역사는 필연적으로 어떠한 방향을든 써내려 져 갈 수밖에 없다-그것이 인류가 바라는 방향이든 아니든 간에.  예측은 불가하겠지만 겪어온 시간을 정리하는 것은 역사학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역사가 써 내려져 갈 것인지 그리고 그 특이점의 시대가 인류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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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거금 30만원을 주고 새로운 환불되지 않는 조건의 넥타이를 샀다. 하지만 사고나서 다음날 착용해보니 생각보다 맘에 들지 않았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A는 새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장롱 속에 재워 둔다면, 30만원을 버리는 셈이므로 이 넥타이를 자주 맸다.

B는 새 넥타이는 맘에 들지 않으므로 장롱 속에 재워두고, 맘에 드는 넥타이를 사용했다.




'새 넥타이를 쓰지 않고 장롱 속에 방치하는 것은 돈 30만원을 버리는 셈이므로 이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A처럼 행동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두가지 경우에 대해 침착하게 비용에 대해 재고해보자.

당신이 새로산 넥타이를 매건, 매지 않건간에 이 30만원은 이미 지불되어 당신의 지갑에서 사라졌다(매몰된 비용이다).  지불된 돈은 두가지 경우에 차이를 느낄 수 없다(돈에게 의식이 있다면...).


 따라서 각각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새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장롱 속에 재워두어 30만원을 버리는 것이 싫어 새 넥타이를 사용한 A의 경우

   --> 30만원 비용소모 + 내게 맘에 들지 않는 새 넥타이를 매고 다닌다.

새 넥타이는 맘에들지 않으므로 장롱 속에 재워두고, 맘에 드는 기존 넥타이를 맨 B의 경우

   --> 30만원 비용 소모+ 내게 맘에 드는 기존 넥타이를 매고 다닌다.


 이제 조금 더 판단함에 있어서 명확해지는 것이 느껴지는가? 두 사람의(A, B의)선택에 모두 내 지갑에서 30만원이 이미 나간 것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따라서 맘에도 들지 않는 새 넥타이를 매는 것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미 나가버린 비용 30만원은 뒤로 하고 나의 마음에 드는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 예에서 나온 넥타이 값 30만원처럼, 이미 버려져서(매몰되어서) 되돌릴 수 없는 비용을 일컬어 우리는 '매몰비용(sunk cost)'라고 부른다. 매몰된 비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좀 더 명확하게 얘기하면 이미 매몰된 비용이 발생한 후에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관계없이 복원될 수 없는 비용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미 매몰된 비용이라는 판단이 서게 되면, 이 비용을 되살리려는 헛된 선택을 하지 말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매몰비용의 오류(sunk cost fallacy)'는 이처럼 버려져서 되돌릴 수 없는 비용에 매달려서 시간적 금전적, 시간적 허비를 하게 되는 인간의 오류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https://www.aol.com/2013/04/03/sunk-cost-definition/


 대개 매몰비용의 오류는 매우 교묘하고 잘 보이지 않으므로,  이 오류에 대해 한번 배웠다 하더라도,  같은 실수를 쉽게 범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매몰비용은 눈에 보이는 '돈'이라는 비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위에서처럼 매몰비용은 돈일 수도 있지만, 시간인 경우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한 분야에 대해 수년 동안 파고들어 연구하였지만, 어느 날 이 주제가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서 과감하게 포기하지 못하고 매달리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미 가망이 없는 연인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귄 시간이 아까워서 헤어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위의 예시들에서 매몰비용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 된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매 순간 순간마다 판단을 해야만 하고, 이러한 판단이 합리적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매 순간마다 내리는 우리의 판단은 과거에 투자한 금전적, 시간적 투자비용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게하는 방안으로 치우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그 투자비용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매몰비용'이 된 후에도 말이다. 


따라서 과거의 행동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매몰비용(sunk cost)'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이미 되돌이킬 수 없는 매몰비용임이 판명되는 경우, 붙들거나 집착하지 말고 과감하게 그 비용을 살려보려는 방향의 헛된 선택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매몰비용의 딱지를 잘 붙일 수 있다면, 우리는 합리적 판단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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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란 

평소 자신이 품고 있는 도덕적 가치관이나 생각이 있을 때,

이에  배치되는(어긋나는) 판단과 행동을 하였을 경우,  또는 이와 배치되는 사회현상 등을 발견했을 경우 등에 발생하는 불일치&부조화로 인한 심리적 불편함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아쉬 쉬운 예로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야"라는 '평소'생각을 가고 있던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될 경우 평소의 자신 생각과 배치되는 행동을 하게되었기 때문에 

심적으로 갈등을 겪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위의 그림 참조)

물론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해서 전혀 마음불편해 하지 않는 비양심적인 사람들도 많지만...



이쯤 되면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단어가, 

살아가면서 굉장히 흔히 겪게되는 심적갈등을 묘사하는 개념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결국에는 서로 불일치되는 두가지(자신의 신념 - 신념과 배치되는현상)가 마음을

불편하게 하므로, 두가지중 하나를 수정하거나 없앰으로써

심리적인 불편함을 해소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여기에는 두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가 있다.


첫번째로  '자신의 신념 - 신념과 배치되는 현상' 사이에서 갈등이 있을 때 

전자인 자신의 신념을 고쳐서 갈등을 해소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스스로 했을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 이미 저질러 놓은 자신의 행동을 어찌할 수 없으므로, 

인지부조화에 따른 심적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념을 손보는 수 밖에 없다.

즉, 일종의 자기합리화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술은 건강에 좋지 않다'라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 

회사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술을 자주 먹는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술은 안좋다'라는 자신의 생각과 배치되는 행동을 하였으므로 인지부조화가 올 것이다.

하지만 이미 술을 먹은 사실은 고칠래야 고칠 수 없는 팩트가 되어버렸으므로 

인지부조화로 인한 심적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결국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가령 '하루에 한잔 정도의 술은 건강에 나쁘지 않다'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즉 이미 행동은 엎질러진 물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자신의 기존 생각을 바꿈으로써

인지부조화라는 심적 갈등을 조정하는 경우가 되는 것인데, 

이를 잘 표현하는 것이 바로  '자기 합리화'라는 개념이다.


알베르트 카뮈(Albert Camus)는 

"인간은 자신의 삶이 부조리하지 않다고 스스로 설득하면서 생을 보내는 동물이다"

라는 말을 했다. 과연 카뮈는 이런 인지부조화라는 인간의 속성을 잘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자신의 신념 - 신념과 배치되는 현상' 사이에서 갈등이 있을 때

후자인 '신념과 배치되는 현상'을 손보아 갈등을 조정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에 배치되는 사회적 현상 또는 증거를 접하게 되어

인지부조화를 느끼게 된 경우가 바로 이 경우이다.

이런경우 자신이 믿고 있던 신념을 고치기보다는 , 이에 반하는 현상 

또는 증거를 부인함으로써 부조화를 없애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것 역시 사회, 정치분야에서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로 

자신이 지지하는 K라는 정치인이 부정부패와 연루되었을 경우

'K라는 정치인은 깨끗하다'라는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가 부정부패에 연루된 증거를 믿지 않거나, 아예 그것과 관련된 팩트를 

무시해버리려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는데 유리한 증거만 받아들이고

불리한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의 경향을 표현하는 다른 개념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또하나의 유명한 개념인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다른 표현으로 체리피킹(cherry picking)이라고도 하는데


잘못된 신념을 맹목적으로 믿으면서, 그 신념을 강화시킬 수 있는 증거만 

받아들이고(자기가 좋아하는 체리만 피킹하고), 

그 신념을 무너뜨릴 수 있는 불리한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는

통상적으로 흔히 범하는 인간의 오류를 콕 찝어서 잘 표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간의 사고오류는 대개 오류임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온갖 부정부패로 찌들은 모 정치인을, 그 부패의 증거를 끝까지 무시하면서까지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OOO와 같은 단체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https://larspsyll.wordpress.com/2016/07/21/cherry-picking-economic-models/ 수많은 증거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체리'라는 증거만 피킹하는 것이 바로 확증편향이다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늘 '인지부조화'를 겪으면서 살아간다.  

또한 동시에 '인지부조화'의 불편함을 아주 쉽게 '확증편향'의 오류로 해소해버린다.

사실 인지부조화와 확증편향은 우리의 내적인 삶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인지부조화'가 왔을 때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르며,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인간의 자세는 무엇일까?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접하게 된다면 

이를 '확증편향'의 태도로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용기있게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여, 

이를 계기로 자신의 가치관을 한걸음 한걸음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발전시킬 때만이, 비로소 자신의 삶의 가치관이 

더욱더 알차고 더욱더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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