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 된다"라는 명제 또는 주장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국사, 세계사 등에서 묘사되고 있는 세상은,  우리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역사는 반복 된다'라는 명제를 강화시켜준다.  


과거에도 있었던 인간 개인 혹은 인간 집단 사이의 크고 작은 갈등과 권력욕과 탐욕의 향연, 그리고 그것이 누적되어 터지는 피비린내 물씬나는 전쟁은 근현대사에 이르기 까지 반복이 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는 반복 된다"류의 명제는 아마도 변하지 않는 탐욕과 같은 인간본성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덴마크가 오스트리아에와 프러시아에 대항해 싸운 슐레슈비히 전쟁(1864년)을 묘사한 Vilhelm Jacob Rosenstand의 그림.


어쨌든 [호모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사에서 전쟁은 사라져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꽤 설득력이 있고 그의 통찰력에 다시 놀라게 된다.


그 근거의 핵심은 '세계 경제가 물질기반 경제에서 지식기반 경제로 탈바꿈 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과거 부의 핵심은 금광, 밀밭, 유전 같은 물질적 자산이었는데 반해, 현재 부의 원천은 '지식'이다. 따라서 유발 하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전과 밀밭은 전쟁으로 정복할 수 있지만, 지식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없다.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 되면서 전쟁의 채산성이 떨어졌고, 전쟁은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물질기반 경제를 운영하는 지역, 예컨대 중동이나 중앙아프리카에서만 일어나게 되었다."


 또다른 예시로 중국이 미국의 실리콘 밸리를 침입했을 경우를 가정한다. 실리콘 밸리는 지식기반 산업의 메카이므로, 중국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얻을 것은 없다고 말한다.


물론 크고 작은 전쟁과 테러가 아직 지구촌 뉴스에서 톱기사로 다뤄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지만,  중세전쟁사로 학위를 받은 유발 하라리가 내세우는 구체적인 데이터 앞에서는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다. 인류사 전체를 내려다보는 스케일에서 보았을 때 확실하게 전쟁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가 인용한 논문에 의하면 고대 농경사회에서는 사망 원인의 약 15퍼센트가 인간의 폭력이었던 반면, 20세기에는 그 비율이 5퍼센트에 불과했고, 21세기 초에는 약 1퍼센트로 줄었다고 한다.

출처 : www.huffingtonpost.com/daniel-wagner/soft-targets-and-tourist-_b_10728626.html


유발 하라리의 책 시리즈들의 특징은 이렇게 큰 시간 스케일(인류가 영장류로부터 인간으로 첫발을 내디딘 시점부터 지금까지)에서 인류 역사 전체를 관조함으로써,  몇 백년 단위의 역사적 고찰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굉장한 통찰력 있는 결론을 내린다는 점이다.

인류역사에서 봤을 때 인간의 어떤 부분이 본질적인 것인가?(불변하는 것인가?), 어떤 행태는 본질적이지 않은가?를 알고 싶다면 100년 역사의 고찰보다는 1000년 역사의 고찰이, 1000년 역사의 고찰보다는 10만년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이 더 본질적인 인간의 그 무엇을 더 잘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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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서 원서로 복소수함수론을 배울때 재밌다고 생각한 부분이 

중고등학교 때 배우는 개념인 '무리수'가 영어로 irrational number 였다는 것이다.





'irrational'은 '불합리한', '비이성적인'이라는 뜻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주요뜻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irrational number가 '불합리한 숫자'라고 언뜻 읽혔기 때문이다.


자세히 뜯어본 결과,  ratio(비율, 비)에 부정을 뜻하는 ir- 어미가 붙여서 

ir-rational 즉 (두 정수의)비율로 나타낼 수 없는 숫자라는 본래의 의미도 추측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없는"과  "불합리한"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다른 수 많은 영단어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두가지 다른 뜻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끝냈던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irrational" 단어의 원래의미는 '무리수'(irrational number)로부터 온 것이 맞았다.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만든 수학자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의 모임인 '피타고라스 학파'는 정수를 특별히 좋아했다고 한다. 만물의 근원도 모두 정수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과 관련해 아주 곤란한 문제가 하나 발생했는데, 길이가 1인 이등변 직각 삼각형의 대각선의 길이가 2의 제곱근인데, 이것이 두 정수의 비로 나타낼 수 없는 무리수로 판명이 된 것이다. 즉 루트2가 무리수라는 것인데, 루트2가 무리수(irrational number)라는 것 역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통해서 밝혀졌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파는 무리수를 모종의 위험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무리수의 존재가 그들 세계관의 불합리성과 오류를 암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irrational'이라는 단어가 '불합리'라는 뜻을 갖게 된 연유가 되었다.(칼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발췌)


피타고라스는 이렇게 중요한 수학적 발견을 외부에 공표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정수비율로 나눠지지 않는'이라는 뜻의 'irrational'이라는 단어에 '불합리'라는 뜻을 부여한 사람은 바로 피타고라스였던 것이다. 


무리수를 세계에 대한 위험적 요소로 받아들였다니, 현시대 사람들이 볼 때에는 웃을 수도 있는 부분이다. 결국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가졌으며 수학적 논증의 객관성 및 확실성에 매료되었던 피타고라스였지만 고대사람으로서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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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안철수.

끄적이기 2015. 12. 9. 10:00

사진출처 : 한겨례신문

 

최근 제 1의 야당이 분당 파국으로 까치 치닫는 상황을 보고 있자면 쓴 웃음만 나온다.

 

안철수는 분명히 '호모폴리티쿠스'는 아니다. 착한아이고, 책과 글 밖에 모르던 모범생이였지만

정치 철학적 주관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아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적 암흑기인 군부독재

시절에도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던 사람이 안철수가 아니였던가?

 

이러한 안철수가 정치를 한다고 나섰을 때부터, 기대반 우려반이였지만 역시나 우려한대로

흘러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한 사람이 정치인으로 등단하였을 때 그 사람의 정치적 소신이나 철학이 없다면 그가 몸담고

있는'판'은 그 판에서의 생존을 위한 '판으로 변질되게 된다. 정치의 '장'에서 한 사람의 정치인이

추구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정치인의로서의 생존'이 되어버리면, 이미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대외적으로 주장하는 말, 주장하는 문구는

대외 명분으로 변질되게 되기 때문이다. - 본인이 이 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숨은 목적을 뒤로 한채.

 

안철수는 착한 이웃, 착한 학생, 착한 교수님 정도는 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판에서의 자신의 생존 '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우선해야 하는 정치의 장에

어울리는 사람은 절대 아닌 것이다.

 

안철수는 이미 정치판에서 생존게임을 하고 있다. 생존게임을 하는 순간 그가 (정치인으로서)

하는 말, 그가 걷는 길은 모두 진정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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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상품은 수요의 법칙(Low of demand)에 따라서 가격이 비싸질 수록 수요는 줄어든다고 한다. 하지만 베블런상품(Veblen good)은 비싸질 수록 오히려 그 상품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도가 커지게 되는 상품을 일컫는다. 예를 들자면 모피 코트나 여성들의 백(Bag), 롤스로이스 자동차와 같은 사치품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보통의 경우는 제품 품질이 높을수록 그에 비례해서 합당한 가격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가 일어나는 이유는 역으로 비싸게 책정된 제품의 가격을 보고 제품을 훌륭한 것으로 판단하게 되는 인간의 허영심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제품이 좋으면 가격이 높은게 성립된다. 하지만 역으로 가격이 높다고 해서 제품이 좋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애초에 인간에게 '이성적/합리적 판단능력'은 매우 보잘것 없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게 배블런 상품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면 훌륭한 제품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제품의 기능, 디자인, 내구성 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결론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합리성과 이성이 결여된 인간이란 존재는 역으로 제품의 높은 가격을 보고 제품이 훌륭한 것, 또는 명품으로 간주하게 된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 아니라 어리석은 감성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라는 것.. 이것 만이 불변의 진리이라는 것을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는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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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 - 불가의 '집착' 그리고 칸트의 자유론

군 시절 담배의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던 기억.

 내가 군대에 있을 때의 일주일간 필드 훈련을 나가게 되었는데 일주일이 지나자 모두들 보급품이 동이 나게 되었다. 가장 큰 애로사항은 담배였는데 나를 포함한 우리 소대원들은 거의 모두 흡연자들이었기 때문에 담배가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찰나, 필드 훈련에 늦게 동참한 한 간부(중사)가 앉아서 쉬고 있는 우리 소대원들 옆을 지나가다가 담배 한갑을 던지고 사라졌다.

흡연자라면 그 때의 광경은 상상이 가리라. 모두들 아프라카에서 굶주려 죽는 이들이 '구호물자'를 받았을 때처럼 담배 한대를 확보하기 위해서 아비규환(?)이 되고야 말았다. 그 사건을 겪으며 나는 느낀 것이 많았다. 담배를 배우기 전이었던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담배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았는데 왜 이제는 담배가 없으면 불행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담배를 배운 이후 행복감이 더 증가하지는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돌아보니 담배를 태우는게 기호행위가 아니었으며 나는 담배에 일종의 노예가 되어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그 후에 여러번의 시도 끝에 담배를 끊을 수 있었다. 흡연자였을 때나 비흡연자인 시절이나 내 삶의 행복감은 같은데 차이점은 흡연자 시절은 담배가 떨어지면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즉 흡연자로서의 나는 담배의 노예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순간부터 담배를 피는 행위는 나의 선택사항이나 기호가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일을 군대에서 겪으며 매우 드물게도 군대에서 담배를 배워나오는 대부분의 케이스와는 다르게 군대에서 담배를 끊고 나오게 되었다. ^^;;

담배를 끊은지 10년도 넘은 지금은 물론 담배에 대한 미련은 없다.(물론 아주 가끔 생각이 날 때도 있지만 : 라면먹고 난후, 커피마시고 난 후 등등)

 

 

요즈음 읽고 있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칸트의 사상, 특히 그의 도덕철학에 대한 부분을 읽었을 때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담배를 끊으면서 느꼈던 것들을 칸트의 자유론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나의 자유에 대한 단상은 불가에서 말하는 '집착으로부터의 벗어남'과 같은 의미라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더욱 놀랐다. 동양과 서양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정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자유라면,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는 많지 않다!

"나는 하루 종일 자유롭게 선택이라는 행위를 하는데 무슨 말인가?" 생각할 수도 있다.

칸트의 자유에 대한 생각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선택 행위들의 대부분은 자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몇 개 없다.

"칸트의 논리는 이렇다. 다른 동물처럼 쾌락이나 고통 회피를 추구 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식욕과 욕구의 노예로 행동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아이스크림을 어떤 맛으로 주문할지 결정한다고 치자. 초콜릿? 바닐라? 아니면 에스프레소와 바삭한 과자를 얹은 아이스크림? 이는 언뜻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어떤 맛이 내 기호에 가장 잘 맞는지 파악하는 행위이며, 여기서 내 기호는 애초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바닐라보다 에스프레소와 과자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욕구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욕구일 뿐이다"

- "정의는 무엇인가" 에서 발췌

즉 애초에 그러한 욕구를 직접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 욕구를 추구한다고 해서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칸트에 의하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선택하느냐 초코 아이스크림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내 '기호'에 잘 맞는지 파악하는 행위이며

여기서 내 기호는 애초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떠한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진정한 선택,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칸트가 생각한 것은 이 경우는 우리의 '본능과 기호'에 '복종'한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처럼 고통을 회피하고 쾌락을 추구한다면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노예로 행동하는 것으로 보았다. 초원의 사자를 생각해보자. 사자는 드넓은 초원을 종횡무진 하는 적수가 없는 사자를 보면 자유롭게 사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자에게 아무런 자유도 없다. 그는 '허기짐을 채워야 한다'라는 '본능'과 '생존욕'에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종속되어 살아간다.

 

아이스크림의 선택과 같이 원초부터 존재한 본능에 기반을 두어 선택하는 행위는

이미 결정된 내용에 따라 행동하는 '종속적인' 행위이다.

사자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칸트의 자유론에 비추어서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선택'하고 있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행동들은 사실 본능과 쾌락에 의해 '지배를' 받는 행위들임을 알 수 있다. 술이 좋아서 술을 먹는 '자유'를 행사한다고 하는 많은 남성들은 사실 술이 없으면 불행해진다. 담배를 '태울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담배가 없으면 매우 불행해진다. 이러한 자유는 '본능에의 굴종'이지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아니다. 오늘 하루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생계유지를 위해서' 살아간다. 이러한 하루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신이 '돈의 노예', '욕망의 노예'가 되어있음을 모르고 살아간다.

실상 이렇게 느끼고 나서도 '돈과 욕망의 노예'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돈과 쾌락이 없으면 불행함을 느끼는 '돈과 쾌락에 종속적인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범인들은 돈과 쾌락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가는 '초인'들이 부러울 뿐이다. 결국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궁극적인 자유의 존재가 바로 '신'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지 않을까?

 

칸트의 자유론과 불교사상에서의 '자유'의 차이점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위를 '자유로운 선택'에서 배제한다면 과연 어떠한 것이 자유로운 행위라고 보는 것일까? 칸트는 자율적인 행동을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나에게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떠한 행위의 목적이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이라면 그 행위는 '자율'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칸트가 말하는 자유로운 행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렇듯이 본능적 욕구에 충실할수록 종속적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자유론과 불교의 사상은 동일한 출발점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모든 본능적 욕구(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궁극의 자유로 보는 불교철학과는 달리 칸트의 자유론은 '자율적인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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